메타포 게임
‘최고의 가르침을 펼 때 나는 마치 와 같다.’ 나는 이 질문에 되도록 빨리 답하라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미지를 검열하거나 편집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요청한다.
이 훈련의 목적은, 이성적인 마음은 절대 포착하지 못할 통찰이 담긴 은유가 우리의 무의식에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아무리 황당하고 낯설지라도 그냥 물리쳐서는 안 된다. 모든 소그룹이 이런 작업이 수월할 만큼 자신의 내면과 친밀하게 연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료들 앞에서 조금 바보스러워 보이더라도 개의치 않을 때, 그 보상으로 얻는 자기 이해는 상당하다.
나 자신에 대해 떠올린 이미지를 탐색하면서 이 훈련의 위험과 보상을 설명해 보겠다. 이 이미지가 떠오른 것은 20여 년 전인데, 구체적인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최고의 가르침을 펼 때, 나는 마치 양치기 개와 같다.’ 크고 복슬복슬하고 사랑스러운 개가 아니라, 목장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며 양 떼를 모는 보더콜리 말이다.
언젠가 바위로 덮인 스코틀랜드의 들판에서 그 개를 보았는데, 아마도 그때 이미지가 각인된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교사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의미를 해석하면서(워크숍 참가자들도 자신의 이미지를 해석하게 한다), 나는 양치기 개의 이미지가 교사로서의 내 정체성과 진실성에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 상상 속에서 양치기 개는 네 가지 핵심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양들이 풀을 뜯는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한다. 둘째, 옆길로 새는 양들을 끊임없이 다시 데려와 그 공간 안에 묶어둔다. 셋째, 위험한 포식자들에게서 그 공간을 보호한다. 넷째, 필요한 먹이를 얻을 수 있도록 양들을 데리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 이미지를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 작업으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백해졌다. 나는 양치기 개라는 투박하고 불편한 이미지로 가르침에 관한 보다 정제된 이미지를 정립해 왔다. 앞서 여러 장에서 탐색한 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진리의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교실에서의 나의 역할은 상상 속에서 이해한 양치기 개의 역할과 비슷하다. 우선 학생들은 스스로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데, 대개 ‘능동적 학습’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나는 학생들을 먹을거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좋은 텍스트, 잘 계획된 훈련, 생산적인 질문, 정제된 대화 등이 먹을거리에 해당한다. 학생들이 그곳에서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나면, 나는 그들을 먹을거리가 있는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학생들을 그곳에 묶어 두어야 하며, 길을 잃거나 이탈하는 학생들에게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그러는 동안에 학생들을 두려움과 같은 치명적인 포식자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다른 교사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칠까? 나는 모른다. 이 이미지는 나의 무의식에서 왔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과 진실성을 거칠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반영한다. 내가 이끌었던 워크숍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유익한 이미지를 많이 떠올렸지만, 내게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폭포, 등산 안내원, 정원사, 기상관측기 같은 이미지는 그들 각자를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좋은 가르침은 결코 테크닉으로 격하될 수 없다. 좋은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진실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은유 게임’으로 두 걸음 정도 더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정체성과 진실성을 좀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은유가 드러내는 강점뿐 아니라, 그것이 암시하는 내면의 그림자까지 검토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정체성과 진실성이 항상 밝고 빛나는 것으로만 구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은유가 암시하는 그림자는 분명하다. 나는 ‘양 떼’라는 단어를 나쁜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온순하거나, 생각이 없거나, 몸을 사리는 듯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가끔 화가 난다. 이 그림자가 나와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제대로 된 가르침을 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치기 개의 은유가 내면에 잠재된 그림자를 알아차리도록 나를 일깨운다면, 나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교사로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의 은유에서 도움이 될 만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3장에서 언급한 두 번째 사례를 떠올려 보자. 행동이 불량한 여학생 세 명과 교실에서 신경전을 벌인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양치기 개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라고 자문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 은유에 최대한 충실한 방식으로 질문에 답하려고 애쓸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문제 해결을 위해 테크닉에만 의존하지 않게 된다.
이 훈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이미지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교실에서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기술적인 임시방편과는 다른 방식을 생각하게 한다. 상상에서나마 가장 깊이 있는 지침을 발견하는 정체성과 진실성의 내면 영역으로 나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그 지침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양치기 개는 나처럼 수업 분위기가 흐려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다스리기 힘든 양들이 완전히 삐뚤어지지 않게 끊임없이 짖으며 경고했을 것이다. 거듭 경고했는데도 계속 무리를 이탈하려 한다면, 양치기 개는 나처럼 나머지 양 떼를 모두 희생시키지 않고, 그들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양치기 개라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을 때까지 ‘착한 사람’ 노릇을 하는 대신, ‘강인한 사랑’을 실천했을 것이다. 나는 이 은유의 의미를 다양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번역할 수 있다. 태도가 불량한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는 방식부터 행동을 개선하기 위해 학점을 짜게 주는 것까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지침과 그 지침을 따르는 데에 필요한 힘은 은유 자체의 정신적인 에너지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커 J. 파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