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
예1)두건에 관한 바울의 명령(고전 11장) – 성경적 논거가 더 있는 말씀(창조 질서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전거말고도 본성의 논리와 교회의 관습까지 동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고전 11:5~6)
예2)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장)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4~35)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주장은 대부분 고전 14장을 인용함. 하지만 11장의 명령은 가볍게 무시한다.
여성 안수는 반대하면서 여전도사와 주일학교 여성 교사를 두고 가르치게 한다.
‘여자의 짧은 머리는 부끄러운 것’이라는 문화적 판단이 옛 시대의 유물이면서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문화적 판단은 오늘도 유효한 이유는? 내가 가진 기존의 입장을 수호하고 싶어서 성경적 권위를 활용하는 것 아닐까?
저자 역시 두건을 쓰는 것이 ‘성경적’ 해석이라 생각지 않는다. 저자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우리의 일관성 없음을 지적하는 것.
해석에 일관성이 없다는 말은 우리 해석이 비신학적 요인에 좌우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말씀 해석과 순종의 회로보다는 나의 입장과 성경적 정당화라는 회로를 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해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고, 자신과 다른 해석을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모는 것은 정치가의 수사이지 신실한 순종의 자태는 아니다.
나의 입장과 말씀의 입장
정확한 정황 파악은 분명한 이해의 첫 단추다.
예1) 내가 쏜다 : 사격연습장과 식당과 같은 정황이 정해지면 말의 의미가 분명해짐.
따라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읽는 구절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지 분명히 파악하는 것.
우리는 막연한 표현을 즉시 구체적으로 만든다. 거의 자동으로 그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상황을 추측하고, 그 상황에 비추어 그 표현을 ‘이해’한다.
예1) 열쇠 3개가 필요하다 : 현관 열쇠 세 벌, 혹은 결혼을 생각하며 ‘엄청난 혼수비용’을 걱정.
하지만 나의 지레짐작이 성경의 의도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서 확보한 문맥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헛다리’일 것.
나는 나의 해석이 편하다. 내게 자연스러운 해석은 성경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성경적 언어에 대입해 재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1)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 1:19)
영적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출옥’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예2)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영적 소망과 관련 없고 ‘배만 상하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이 구절은 주로 말씀의 위력에 관한 선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분위기를 파악하고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빌 4:10~20은 그 전체가 빌립보 성도들의 재정후원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이다. 빌립보 성도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영치금을 넣었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 중 하나는 이런 호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10절에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이것이 잘못 전달되면 마치 돈을 더 달라는 요구로 오해될 수도 있어서 ‘나는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전달하고자 4:11~13 말씀을 쓴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
따라서 13절은 소위 믿음의 위력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가진 자족의 능력에 관한 고백이다.
성경 말씀의 문맥, 정황을 묻는 과정은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태도이다.
서신서와 형식
글에는 형식이 있다. 우리가 서신서(편지)를 잘 이해하려면 그 형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통상적 형식과 달라지는 대목을 만났을 때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의 편지는 1. 보내는 사람 이름, 2. 받는 사람 이름, 3. 간단한 인사말, 4. 감사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편지는 받는 교회가 어디냐에 따라서 형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통상적인 문안 대신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특유의 표현이 나온다.
예1) 로마서 : 바울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보내는 편지. 로마교회에 자신의 사역과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의 도움을 통해 로마제국의 서반부 선교를 수행하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선교편지. 자기 소개의 글이 길다.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 편지할 때 자신을 길게 소개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이런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예2) 갈라디아서 : 바울이 불편한 심기로 기록함. 받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 굉장히 짧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로만 끝난다. 비틀린 심사를 은근히 드러내는 대목.
예3) 로마서 : 조심스런 상황에서는 받는 사람들인 성도들에 대해 예의 바르고 듣기 좋은 묘사들이 등장함.
예4) 갈라디아서에서는 감사할 상황을 찾지 못하므로 감사가 나올 부분에 ‘내가 깜짝 놀랐다.’라는 비난의 말이 나온다.
형식을 알면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불필요한 확대 해석을 피할 수 있다. 바울의 인사말은 언제나 ‘은혜와 평강’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다른 표시가 없는 한 이 개념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선 곤란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교회에서 흔히 행해지는 축도에서 사용되는 구절이다. ‘안녕’에 해당하는 통상적인 축복 형식의 인사말이다.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는 성경이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만, 한국 교회에서 이 구절은 사실상 그 원칙의 예외이다.
보내는 이의 입장에서는 받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건네는 인사의 축복을 안수받은 목사만이 던질 수 있는 축도로 만든 것은 주석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정당화하기 어렵다.
물론 목사가 고린도전서 13장 13절로 축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정작 위험한 것은 이 구절이 목사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우기는 발상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종교개혁의 원리를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성도는 자유롭게 이 구절을 인용하며 서로를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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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과 해석대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권위로 나의 해석에 정당성을 가진 경험이 있는지? (QT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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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내용과 실제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다르게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성경 구절 중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