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거짓 예언자들

평화와 번영의 복음, 풍성한 예물, 그것이 멸망해 가는 유다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단지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의 책임만이 아니라, 그들과 백성의 욕망이 일치한 결과다. 그 메시지는 자신의 욕심을 따른 깨달음이며 그 행위는 신접한 무당과 다를 바 없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신명기에 따르면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증험과 성취”이다. 예레미야 28장의 상황 역시 서로 반대되는 두 예언이 동시에 등장한 현장에서는 어느 쪽이 참된 예언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예레미야의 반응과 하나냐의 반응

예레미야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냐도 예언자임을 인정하면서 그들 이전에 사역했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말씀을 상기시킨다. 재앙을 예고하는 것은 공동체의 그릇된 신앙과 삶에 대한 경고이자 회개의 메시지이다. 삶을 돌이켜 야훼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계시의 질이나 특별한 체험의 우월함을 통해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전승을 토대 삼아 오늘의 현실을 분석하는 예레미야야말로 모범적인 해석자이다.

하나님의 계시, 합리적인 해석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처하는 모든 상황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문제는 이렇게 합리적인 생각을 제시하면 곧바로 ‘교회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라’든지 ..는 식의 말을 듣게 된다는 점이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자랑스러운 구호 역시, 해석의 다양성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무시무시한 독재와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기 일쑤다.

생각해 볼 점

  1. 평화와 축복, 번영을 선포하고 주어진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종교 지도자들과 이를 카리스마적 지도력이라고 좋게 여기며 자신에게 있는 귀한 재물을 아낌없이 바치는 백성, 안타깝게도 두 모습이 오늘 우에게 전혀 생소하지 않다. 담임 목사와 회중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암묵적인 합의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가?
  2. 공동체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경우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던 적은 없는가? 양쪽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분쟁했던 사례가 주위에 있었는지 찾아보고, 신앙 공동체에서 분쟁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한 경우가 있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나누어 보자.
  3. 하나님의 계시와 합리적인 해석학이 어떤 식으로 공존 가능할까?

6. 새 언약

심판은 이미 정해진 일

이 거짓 예언자들은 현실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이들은 어디에서건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들의 거짓 평화 선포로 백성은 현실을 착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벼이 여기게 되며 헛된 희망을 품고 살게 된다.

포로를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로 포로된 처참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미슈파트’ 또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상처받아 고통이 심하다고 부르짖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악행과 죄로 인한 결과이다(렘30:15). 하나님의 징계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고치시고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돌이키시며 구원하시지만 이 백성의 잘못에 합당한 징계를 내리시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신다.

‘내 백성-너희 하나님’

하나님은 곤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이전에 그들의 곤경을 ‘이용하여’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을 건져내신 다음 자유로운 상태의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제시하고 맺으신다.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에는 먼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

율법은 은혜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과 은혜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삶의 규례다. 그 백성은 전적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과 규례들은 야훼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의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존귀한 삶의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내 백성-너희 하나님’이라는 관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와 그 안에 살아가는 백성을 의미한다.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 믿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부르심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거듭난 인생들이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자녀이자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언서들은 ‘내 백성-너희 하나님’ 표현을 빈번히 씀으로써 이미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름받고 붙잡히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야훼께 가까이 나아감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심장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던 예레미야는 그런 점에서 야훼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만남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북왕국을 향한 말씀

야훼의 복

구약은 곧잘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열거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온전함과 광범위함을 표현하곤 한다. 여기에는 고아, 과부, 나그네 같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시각장애인이나 다른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돌이키시는 그날은 이렇듯 한 공동체 내의 연약한 구성원 모두에게 구원과 회복이 미치는 날이다.

라헬의 슬픔

라헬과 한나는 자녀로 인한 고통을 겪는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런 점에서 자녀 잃은 슬픔을 담고 있는 라마의 울음소리에 대한 예레미야 31장과 연관된다. 아울러 사무엘상 10:2은 사무엘이 거주하던 라마에서 조금 더 가면 베냐민 지경이고 그곳에 라헬의 묘실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이러한 전승을 예레미야도 알고 있었다면,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라헬의 무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라마와 라헬의 눈물을 연결시켰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걸음을 가르치시고 멍에로 이끄시지만 이스라엘을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씌우시는 멍에는 거절하되 그들에게 떡과 물을 주는 애굽의 멍에는 달게 진다. 그래서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애굽과 앗수르를 향하여 끊임없이 구애를 보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다.

“에브라임”은 기본적으로 북왕국을 가리키지만, 31장 전체 맥락에서 온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은 흩어진 유다를 향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온 백성을 향한 마음이다.

북왕국 회복 예언의 의미

예레메야 31장은 예언자가 지닌 ‘온 이스라엘적 관점’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인 것이다.

  1. 구약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성취될 전망이 보이지 않지만 북왕국의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알고 선포하고 보존하고 전달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이상을 마음에 품고 선포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큰 꿈’은 ‘일만 선교사 파송’같이 규모가 거창한 꿈이 아니라,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세상, 보습과 낫의 나라와 같이 도무지 비현실적이지만 하나님이 주셨기에 평생 마음에 품고 소망하며 기도하는 꿈, 그런 꿈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2. 열왕기서에서 보듯 북왕국 역사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난 역사이며 우상숭배로 멸망한 역사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와 여러 예언자들에게는 ‘온 이스라엘적 관점’이 있으며, 그들이 예언하는 회복의 지향은 북왕국까지 포함한 ‘온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3.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 예수님의 예언 성취

새로운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31:27)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명하신 모든 말씀을 단단히 지켜보시면서 이스라엘이 헛되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완전하게 파괴하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렇지만 심판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트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이 되셨다.

이것이 내가 저 날들 후에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이라. 야훼의 말이니라. 내가 그들의 속에 나의 토라를 두리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내가 그것을 기록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31:33 저자 사역)

그러므로 새 언약의 주된 특징은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요구가 없다는 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 혹은 하나님의 토라를 마음에 새겨 주신다는 점이다. 결국 새 언약은 ‘토라(율법)의 내면화’라는 점에서 옛 언약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막대한 양의 제물과 제사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기에 예언자들은 줄기차게 유다와 이스라엘을 책망해 왔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으리라 여겼지만 정작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할 것은 그들의 지혜도 용맹도 부귀도 아니고 오직 야훼를 아는 것, 야훼를 알되 그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새 언약의 의의

바벨론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쌍방의 언약 관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를 번번이 실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끊임없는 반복이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 듣는 방식은 이스라엘 때문에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바벨론 포로 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언약 의무 이행 여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죄 용서와 은혜가 선포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속마음에 친히 그의 법을 기록하시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두셔서 야훼를 알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게 하실 것이다.

새 언약과 신약

히브리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로 맺어진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 역시 새 언약이 예수의 피로 세워졌다고 증언한다. …외부의 돌판에 새겨진 율법 조문의 권위가 아니라 성도들 각각의 마음에 부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참된 자유와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새 언약은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가 증언하는 바, 야훼를 알게 됨으로 인한 ‘내 백성—너희 하나님’ 관계의 실현이다. 새 언약을 설명하는 히 10:15-18 다음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말씀(히 10:19-25)이 이어진 점은 참으로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았으니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 그것이 새 언약인 것이다. 이제 부어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내면에 새겨두신 토라를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가르침의 출처를 알게 된다(요 7:17). 그러나 토라를 거부하고 순종치 않는다면 주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 “넘어질까 두려워하라”는 신약의 언급은 이에 대한 경고이다.

생각해 볼 점

  1. 28장 하나냐의 선포와 29장 스마야의 사역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희망에 가득 찬 긍정적인 사고가 가져다주는 위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2.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소중함과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음은 대부분 ‘구원의 기쁨’에만 머물러 있다.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 이들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올해 목표 혹은 표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합당한가? 교회 공동체가 꿈꾸어야 할 목표와 이상의 바른 내용은 무엇일까?
  4. 예레미야의 온 이스라엘적 관점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5. 심판과 회복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 사랑의 양면이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6. 새 언약을 ‘토라의 내면화에 기반을 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할 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