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예레미야의 고백(11~20장)
예레미야서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중 뺄 수 없는 부분은 예레미야 자신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사역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산 증거다.
삶의 긴 여정 동안 그에게 임한 고난과 한결같은 순종이 책 전반에 걸쳐 다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레미야 자신이야말로 순종의 가장 중요한 모형이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예레미야의 선포뿐 아니라 그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긴 세월에 걸쳐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백성의 비난과 모욕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 곤경에서 건져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놋성벽처럼 단단해져서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의 처절한 고백들이 많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사람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 대해 스툴만이 잘 지적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고백들은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 고백들은 현재의 기록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언자의 선포와 예언자의 인격 모두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 첫 번째 고백
아나돗 사람 :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아나돗 사람조차 예레미야가 증언하는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레미야가 당시 유다 땅에 살던 모든 사람의 근본을 뒤흔드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의 행동을 “반역”이라고 표현하는 예레미야의 선포는 당시 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말이었다. 예레미야의 선포와 삶은 겉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야훼를 섬기는 이들이 사실은 야훼를 떠났음을 폭로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예수님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주님을 제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니면 자신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주님을 제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니 예수를 죽이지 않고는 자신들의 평화를 되찾을 수 없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예수를 죽인 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들, 그것도 대대로 하나님을 예배해 오던 작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교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밀어주는 오늘의 우리 교회와 조직폭력배의 의리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가게마다 붙여 놓은 교회 마크는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당하던 시대에 물고기 표시는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숭고한 신앙의 상징이었지만, 고위층으로 갈수록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높아지는 오늘날, 가게마다 승용차마다 붙어있는 교회명찰과 물고기 표시는 패거리 의식의 발현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나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2:1)
예레미야의 질문과 번민은 교리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응보 논리에 따른 것도 아니다. 이는 깊은 부르짖음이자 실존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무어라 대답하시는가?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렘12:5~6)
하나님은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앞으로 더 크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텐데, 그때 어떻게 하려느냐고 예레미야에게 되물으신다.
하나님은 복잡한 문제에 명쾌한 답을 주는 대신, 더 큰 위협과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신실함과 용기를 가지라고 촉구하신다.
긍정적인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그저 ‘앞으로는 상황이 좋아질 거야.’가 아니다. 고난의 미래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길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긍정적 신앙’ 이다.
2. 두 번째 고백 – 항의
닥쳐오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그 택하신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들을 물리쳐 유다를 회복시켜 주실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동포들과 유다 왕들을 향해, 이토록 단호하고도 확고한 심판과 재양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이 어찌 고달프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15:10)
자신의 출생을 탄식함. 예레미야는 누구도 해코지 하거나 빚을 진 적이 없음에도, 모든 이의 저주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저주하는 하나님의 사람, 가는 곳마다 분쟁과 다툼을 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람.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하고 복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와 예레미야는 확실히 그 간격이 크다.
예레미야의 탄식 : 재앙이로다(10절)
하나님의 응답(11~14절)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11절)
예레미야의 탄식 : 주께서는 속이는 시내 같습니다(15~18절)
하나님의 응답 : 내가 너를 건지리라(19~21절)
강하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후 예레미야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에게 더 이상 재앙이 없었는가? 오히려 그의 삶에는 더 큰 환난이 닥쳐왔고, 여호야김 시대 이래 예레미야는 대부분의 인생을 감옥이나 토굴에 갇힌 채 지내야 했다.
그렇다면 11절의 위로의 말씀의 참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고 복음 주심으로써, 예레미야는 그 어떤 시련이나 더 큰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고 감옥과 토굴에 갇혀 지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위로의 본질은 고난의 길에 언제나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 자체이다.
하나님을 “속이는 시내”에 비유한 예레미야. 사막을 걸어가는 지친 여행자가 저 앞에 샘이 보여서 뛰어갔더니 신기루였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심판의 말씀을 받은 대로 전했다. 그러나 믿었던 하나님은 어느새 그의 곁에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엄과 지존하심, 심오한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며 마땅한 경배와 찬양을 돌릴 것을 명하는 우리네 신앙의 틀로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종종 구약은 잘 짜인 교리 체계나 조직 신학을 흔들어 놓는다. 교회가 전통으로 받은 교리 체계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교리는 언제나 성경 본문보다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 교리가 본문을 이끌 것이 아니라, 본문이 교리를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질문과 도전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모습이다. 예레미야만큼은 살아야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와 동행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질문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문제 제기는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신뢰와 경외를 반영한 결과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19)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는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는 뜻이다. 헛된 것을 말한다는 것은 고립된 예레미야가 즐거워하는 백성의 모임에 속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귀한 말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맡기신 말씀이다.
순종에 길들여진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하다가도 반대에 부딪히거나 약간의 어려움만 겪어도 덜컥 놀라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하며 이전의 순한 양 같은 삶으로 돌아가 버리거나 평화와 행복, 축복의 메시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이 듣고 싶어하는 달콤한 위로 대신 생명의 말씀을 끝까지 선포하라고 하신다.
3. 세 번째, 네 번째 고백 – 저주의 기도(신원하여 주심)
흔히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재앙과 심판을 내려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저주의 기도’라고 부른다. ‘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이 귀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에서 곧잘 발견되는 ‘저주의 기도’는 꽤나 당황스럽다.
이것이 ‘기도’인 이유는 자신의 직접 원수를 갚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원수를 맡기기 때문이다. ‘저주의 기도’ 이면에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시편 기자나 예레미야 모두 대적으로부터 고난을 받았다고 스스로 원수 갚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