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장이 예레미야 사역의 시작과 의미를 담았다면, 2장부터는 그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외쳤던 말씀이 세부적으로 소개된다. 2장부터 시작된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4:1-4에 제시된 야훼께로 돌아오라는 권면의 외침으로 끝난다.

※ 단락의 짜임새

서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2:1)
책망(2:2-8)가서 외치라. 예루살렘의 귀에(2: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2:2-3)

-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 여호와를 위한 성물
들으라 여호와의 말씀을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족속아(2: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2:4-8)

하나님을 떠나 땅을 더럽힌 백성
심판 선언: 그러므로(2:9-13)하나님이 싸우시리라: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
부연 설명 1: 이스라엘의 죄상을 폭로하시며 드러내시는 하나님

(2:14-3:25)
열방을 의지(2:14-19), 바알을 좇음(2:20-25), 헛된 우상을 의지함(2:26-29),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남(2:29-37), 행음한 백성(3:1-5)
부연 설명 2: 이스라엘의 행음을 드러내시며 돌아오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

(3:6-22)
이스라엘과 유다의 행음(3:6-10),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회복의 약속을 전하시는 하나님(3:11-1), 남편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3:19-22)
이스라엘의 참회의 고백(3:22-25)
권면: “내게로 돌아오라”(4:1-4)

백성의 죄악상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 이어지는 책망과 심판 선포,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촉구와 권면에 있다.

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혼 시절로서의 광야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옛날에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2)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단어의미연결
청년(히: 느우림)“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에서 나옴(1:7)아이라 부족하다 느끼지만 하나님을 향한 ‘인애’가 있었던 시절
신혼 때의 사랑신혼 시기: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떠돌던 때를 의미온통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고 심판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동행한 시절
씨 뿌리지 못하던 땅광야를 의미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사모하고 간구했던 곳
여호와를 위한 성물

(2:3)
광야 시기의 이스라엘을 가리킴(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성전의 물건이 야훼의 성물이기에 특별하듯이 이스라엘은 약하고 작은 민족에 불과하지만 야훼의 성물이기에 어떤 강한 열방도 이스라엘을 함부로 다룰 수 없음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 느끼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신다. 씨 뿌릴 땅도 없었던 이스라엘은 청년의 신실함과 신혼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들은 하나님의 성물이었다. 그러면 이후에 예레미야는 어떻게 아이를 부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그들을 성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가?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 순종한 예레미야와, 동일한 상황에 있으나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이스라엘을 일관되게 대조해서 그린다.

3.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

2장 5절은 이스라엘이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다]”고 고발한다. ‘헛되다(헤벨)’이라는 단어는 허탈한 것, 바람과 같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실존하는 분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허황된 것을 좇았다.

“헛된 것”은 절과 11절에 있는 “무익한 것”과도 연결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바알이 도움이 된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헛된 것일 뿐이었다. 바알이 약속하는 풍요와 넉넉함에 취하니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야훼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고 그들의 자손과 싸우실 것이라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익한 것들을 좇은 겨로가는 그들과 싸우시는 하나님을 직면하는 일이었다.

4.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악

2장 13절을 그들의 죄악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을 그 물을 가두지 못한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에서 “생수”는 ‘살아 있는 물’, 즉 흐르는 물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두 상태가 서로 대조된다. 흐르는 물이 있는가 하면 웅덩이로 대표되는 고인 물이 있다. 하나님은 흐르는 물이시지만,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버리고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아도 마실 수 있는 물을 보관하기 위해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

18절의 언급은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이 애굽과 앗수르의 힘을 빌리고 의지하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주변 강국과 친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이 정치적인 면에서 당연한 일임에도 구약의 예얹자들은 일관되게 이를 반대했다. 하나님은 물이 나지 않는 반석에서 물을 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신 하나님을 스스로의 힘으로 웅덩이에 가두려는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는 고이지 않는다. 그것은 성전 혹은 그 무엇으로도 담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흐르는 것이고, 흘려야 한다.

5. 거짓 경건

2:23절에서 예레미야의 선포에 대한 백성의 반응을 보면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들은 여전히 야훼를 부르며 제사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스스로 더럽혔다고 생각하지도, 바알을 따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야훼를 섬긴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못할 때 발생한다.

백성이 스스로 바알을 따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예레미야는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고 답한다. 그들의 입술의 고백이 아닌 그들이 걸어간 길, 그들이 행한 바가 그들의 신앙임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무엇이 야훼 신앙을 규정하며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증언하는가? 이 질문은 예레미야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으며 백성과 예레미야 사이의 갈등의 초점이기도 하다.

33절은 유다를 가리켜 ‘사랑을 얻으려고 그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는 자들’이라 규정한다. 이어 등장하는 무죄한 피, 결백 주장 등(2:34-35)을 볼 때, 아름다운 치장에 관한 예언자의 선포는 근본적으로 유다의 종교적 치장을 겨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변명한 바로 그 시대에, 종교적인 풍성함과 가난한 이들의 피 흘림이 공존했던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정말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마구 죽였을까? 실제로는 극소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한 정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호들갑을 떤다. 가난하니까 좀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 억울한 경우도 생기곤 하는 것인데, 예언자들은 사회 지도층이 가난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그들의 피가 옷에 묻어 있다고 난리를 피운다. 그러나 그런 이야말로 바로 예언자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3:4-5)

“보호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알루프’는 서로에게 길들여져 익히 잘 아는 사이를 의미한다. 더구나 이 단어와 ‘노여움을 계속하시며 끝까지 진노하시겠나이까’라는 그들의 기도는 시편의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고난받는 의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백성은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죄악을 반복한다.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올리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렘 3:5) 이들은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하나님을 기만하고 이용하기만 한다.(3:10)

정통적인 신앙고백의 이면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이 욕망을 정당화시켜 주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성전에서 이들을 향하여 사죄와 용서를 선포하는 제사장들이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성취하면 사회적으로나 개인저긍로 지탄을 받을 수 있지만, 종교를 통해 욕망을 성취하면 오히려 경건하고 거룩한 열심의 성취라고 칭송을 받는다.

이러한 문제는 제사로 해결할 수 없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이를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칼과 기근으로 답하신다(렘 14:10-12). 그들은, 혹은 그들의 욕망을 정당화시켜 주는 제사장들은 손쉽게 ‘하나님의 진노가 떠났고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 노를 전혀 돌이키지 않으신다.(4:8, 23:20, 30:24)

6. 돌아오라

하나님의 진노 선포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다리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3:22)

‘배역’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바브’인데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슈브’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또한 3:6, 8, 11, 12절에 쓰인 ‘배역’은 ‘므슈바’인데, 이 단어 역시 ‘슈브’ 동사에서 파생하였다. 결국 ‘슈브’ 동사의 형태를 매개로, 돌아선 이스라엘과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이 대조된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열방을 향해 간 것이 “배역”이니, 돌아오려거든 야훼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4:1-2)

야훼께로 돌아간다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본문의 “가증한 것을 버리고”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온 우상숭배를 몰아낼 것을 가리킨다.

두 번째 의미는 ‘흔들리지 말라’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두려움에 발목이 잡혀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미독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를 “진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는 삶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진리에 근거해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와 ‘츠다카’로, 이웃과 마음을 같이 하며 자신에게 대하듯 이웃을 대하는 올바른 관계 그리고 외모나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린 판결과 연관되는 개념이다.

구약에서 열방의 회복을 언급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와 공의, 평화의 세상과 관련이 있다. 결국 하나님 백성의 정의로운 삶은 열방의 회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예레미야와 구약의 본문들은 열방의 목전에서 하나님 백성 된 이들이 행하는 진리, 정의, 공의의 삶이야말로 열방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야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관건은 그들의 삶 가운데 드러나는 정의와 공의의 행함이다.

7. 정의와 공의가 형통의 비결

이스라엘은 번창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으로 알아 열심히 제사를 드렸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늘 우리 삶도 얼마든지 예배드리고 얼마든지 세계 선교를 위해 헌금하지만, 힘없는 이들의 억울한 사정은 남의 일이다.

오늘 교회 현실만큼이나 예루살렘 백성에게도 정의와 공의는 낯설었다. 도리어 그들은 큰 집과 화려한 궁전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영광과 번영을 자랑하고자 하였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으로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렘 22:13-15)

바로 위에서 인용하였던 예레미야 22장에서 정의와 공의는 없이 궁전을 화려하고 크게 짓기에 힘썼던 여호야김을 그 아버지였던 요시야와 비교한다.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안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으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5-16)

이 말씀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이미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이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원칙이기도 하다. 곤경에 처한 자들과 하나님의 연대는 예레미야의 중심 메시지다. 어디서나 영성을 강조하지만 윤리적 행동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정의에 대한 열심과 분리된 영성은 하나님 말씀을 강퍅하게 떠난 것이며 이는 이 민족의 심장부에 놓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