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양 함께 읽기 1

추천 서문 : 기독교교양, 삶의 조소(彫塑)에 관하여

p.7 이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삶의 전체적인 조망을 가진, 지식과 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궁극의 가치와 주제를 구현하는 삶의 조소라 할 만 하다. …신앙 역시 삶의 형성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서문

p.11 어린이와 청소년과 어른이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능력을 습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욱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빚어나감으로써 한 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p.12 경쟁의 모티프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학교와 교육이 경쟁을 통한 이익을 더욱 공고화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교양 이해는 한국에서도 아주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교양 이해를 위해 나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교양의 문제와 관련해서 연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서문

p.15 한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면 사람들이 교양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사실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어떤 세상,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희망을 그리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교양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p.16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교양 이해는 항상 두 축 사이를 오갔다. 한쪽에서는 교양을 인간의 합리성과 세속성에 단단히 묶어 두려고 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종교야말로 교양의 토대라고 주장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교양의 확대를 도모하려고 했다.

1장, 교양은 신학의 주제인가?

서론적 숙고

p.20 예컨대 신앙이란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계몽된 사람이라면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조 신앙과 진화론의 관계가 이런 대결의 무대 한복판에 서곤 한다. 여기에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개입한다. …신앙과 지식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p.21 종교적 인간관은 어린이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끝나지 않고, 교양 과정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다른 대안이 있는데 왜 굳이 종교적 접근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다.

p.22 교육학에 모든 형태의 신학적 식민지화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분위기가 있다면, 신학 진영에서는 신앙의 교육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신학적 신민지화란 신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규정하려는 시도를 말하며, 신앙의 교육화란 신앙마저도 교육적 관점에서 보고 교육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신학적 항변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완성을 교육 행위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런 시도는 인간의 가능성을 이상화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완성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작가의 의도

나의 강조점은 교양 개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교양 이해를 신학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확장하는 데 있다. 이는 교양을 신앙 문제로 만드는 게 아니다. 다만 교양을 하나의 주제로 인식하고 더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신학도 기여하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의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역사적 맥락 : 교양은 성경적 · 기독교적 배경 없이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교양과 신앙 · 종교 · 신학의 관계가 지속적이고 의미를 지님을 밝히고자 한다.
  •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거기서 실천적 결과가 따라야 한다. 신앙 · 종교 · 신학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실천적 측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명제가─특히 교육학 진영에서─사실로 증명이 될 때, 그런 섣부른 판단을 효율적으로 막아설 수 있다.
  • 초월 개념을 중심으로 교양 이해의 경계 지우기와 경계 세우기라는 이중 맥락을 부각하면서 나의 의도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분명히 하고자 한다.

2장, 역사적 맥락 (1. 개념과 실상 ~ 3. 성경과의 관련성)

1. 개념과 실상

p.32 14세기 전에는 교양 개념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교양은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로, 그 뿌리는 독일 신비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14세기 이전, 심지어 19세기 이전에는 교양이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실상은 개념보다 먼저 와 있다.

그러므로 실상 혹은 내용이 개념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p33. 신학자이면서 교육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근본적으로 실천이 이론보다 “훨씬 먼저”라는 사실을 명시했다. …실천은 “이론과 더불어 더욱 의식적인” 실천이 된다. 개념과 이론은 단순히 기존의 실천에 덧붙어 그 실천을 정신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개념 표현과 그로써 가능해진 이론적 파급력 때문에 실상 자체가 변화하기도 한다. 그 실상은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되며, 그 결과 훨씬 다르게 재구성된다.

p.35 역사의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논의는 교양에 대한 어떤 이해에 기반해 있는가?

여기서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레크는 …교양이라는 용어를 특정짓는 세 요소를 언급한다.

첫 번째는 “이 세상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바꾸어 놓는 자율성Autonomie에 대한 요구”다. 이 점에서 교양Bildung과 교육Erziehung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 번째는, 단순히 정치적-위계적 운명에 의해 파악되는 사회가 아니라, “다채로운 자기 형성Eigenbildung을 통해 파악되는 사회”와의 연관성이다.

세 번째는 “공동의 문화적 성취”와 “개인의 내적 성찰”의 결합이다.

p.36 이 긴장 사이에서 나는 일종의 중도를 제안하려 한다. 즉, 실상으로서의 교양을 사회화 혹인 교육과 구분할 것이다.

2. 교양 개념과 그 종교적 뿌리

교양 개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독일어에서 교양 개념의 근원은 중세 후기, 특히 종교적 신비주의에 있다.

  • Bild, 상(像) / Abbild, 모상(模像) / Ebenbild, 초상(肖像)
  • Nachbildung, 모사(摹寫) / Nachahmung, 모방(模倣)
  • Gestalt, 형태(形態) / Gestaltung, 형성(形成)

신비주의에서 교양의 최고이자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더 높이 형성하는 것,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안으로 빚어져 들어가고 높이 빚어지려면 그를 규정하는 세상적 속박과 상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비워져야 한다. 기존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더 높이 빚어지기 위한 전제다. 물론 이것은 어떤 교육학적 과정도, 회심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시는 일이다.

신비주의에서 묘사되는 이 과정─훗날 교양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불린다─은 인간을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인도하며, 이 모습은 인간의 원형 혹은 전형Vorbild으로 이해될 수 있다.

p. 39~42

  • 교양 개념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하나님 형상과 연관됨으로써, 종교에 바탕을 둔 평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아무런 차별도 하지 않으신 곳에 인간이 장벽을 세워서는 안 된다.”
  • 교양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이나 실력, 즉 외적 의미에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성과를 내는 힘을 가리키는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교양의 핵심은 자기만의 경험, 태도, 감정, 삶의 지향을 가진 내적 인간이다. 교양은 항상 내적 인간과 관련된다.
  • 교양 개념은 …이중적 의미에서 관계적 · 소통적 면모를 지닌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 형상이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을 그저 개인적으로, 심지어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거나 실현할 수는 없다. 처음 생겨날 떄부터 교양 이해에 내재된 특성은 상호 소통하며 가꾸어 나가는 관계를 지향한다.
  • 교양은 끝맺을 수 없는 과정으로, 하나님 혹은 초월을 지향함으로써 모든 세속적 물질화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다.
  • 교양 개념은 간학문적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철학적 · 신학적 연결을 드러낸다.

3. 성경과의 관련성

교양은 철저하게 성경의 언어, 성경의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

본보기가 되는 성경의 기본 개념들을 통해 살펴보는 교양의 의미 : 창조, 교훈과 지혜, 새로운 인간

창조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성경이 인간과 세상과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 주는 근본 텍스트다. …(지적설계) 이런 견해는 분명한 오해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이 세상의 생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경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창조주이며 이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관점이 바로 이 창조 신앙에 근거한다. 이러한 창조 신앙은 창조 윤리로 이어져, 인간과 세계가 모둔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한다.

  • 하나님 형상 : 삶의 방향

하나님 형상은 인간과 하나님의 유사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근본적 관계를 뜻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조각상” 인간은 “창조 세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우주적 질서 기능”을 떠맡아야 한다.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은 인간의 잘못된 행위로 중단될 수 없기에 철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은 일종의 이상적 상태, 나중에는 상실된 근원적 상태, 그래서 그리운 마음으로 회상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사명으로서 하나님 형상은 처음부터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현재와 미래를 가리킨다.

  • 하나님 형상 : 민주화, 평등

고대 오리엔트의 인간관에서는 오직 왕만이 ‘하나님 형상’으로 불린다. 그에 비해 성경의 인간관은 일종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 개념에 더 충실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의 “군주화”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형상과 그에 기초한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 능동성, 자율성

성경의 창조 신앙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삶과 행동에 주목하고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첫 장에서는 인간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창 2: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표현이 심각하게 오해되고 왜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표현이─성경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근대에 와서는─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문구로 사용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에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맡기셨다는 사실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창조 신앙에 담긴 교양의 의미가 또한 여기 묘사된 하나님과 맺는 관계, 하나님에 대한 특정 이해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인간의 창조성과 독립성을 위한 여지가 있다. 또렷한 메시지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인간 자율성의 근거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여기서 인간에게 고유한 활동을 펼칠 여지를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창조: 혼돈의 억제와 극복, 학문활동의 장려

혼돈은 창조 과정에서 점차 억제되고 극복된다. 이로써 처음으로 정돈된 관계들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식물과 동물의 생존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세계를 창조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이것은 교양에 대한 생각과 관련해서도 대단히 중요한데─인간이 세계를 탐구하고 그 안에 있는 질서와 법칙을 알아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추함

창조 신앙에 따르면, 세계는 또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만 세계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안녕을 위한 질서이자 궁극적으로는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온전함으로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세계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창조주의 뜻이 비판적 척도가 되어 세계를 진단하고 평가한다. (대홍수 사건)

  • 인간의 조형 가능성과 한계 인식

창조 신앙은 인간과 그의 조형 가능성을 격려하고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창조 신앙이 인간 자율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의 창조자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계에 대한 근본 의식은 교양의 필수 요소다.

  •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

“남자와 여자로”,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와 더불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에 의존하며 그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교양 과정은 의사소통적으로 해석되며 교양의 목표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 설정된다.

  • 타락: 위기에 처한 ‘관계’

인간의 조형 가능성은 인간이 유혹에 빠질 가능성을 포함한다. 인간은 언제든 유혹에 빠질 수 있고 그로 인해 더욱 깊이 추락할 수 있다.

교훈과 지혜

교육은 지혜의 통찰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지혜는 규범적 성격이 강한 세계관을 지향한다. 단순히 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넘어선다. 지혜는 개인과 사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그런 삶을 지지한다. 지혜가 말하는 바는 단순하다. 인간의 행위에는 결과가 뒤따르며 인간은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 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과 그로 인한 결과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 인과응보를 넘어서 : 하나님과 맺는 관계

‘지혜의 신학화’와 더불어 하나님 자신을 세계 질서의 보증자로 간주할수록, 고난의 경험은 더욱 심각하게 하나님에 대한 회의로 이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욥기에서는─하나님이 베푸시는 상과 벌을 인과읭보 관계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 놓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더욱 분명히 보이는 사실은, 하나님의 행위가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의 계산을 벗어난다는 점이다.

  •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인간에게 십계명 같은 율법을 실제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인간이 모든 지혜와 교훈의 토대 위에 서 있더라도, 선한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에 맞게 살면서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과 교양도 이러한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교육과 구원을 근본적으로 구분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을 교육하는 행위가 아무리 중요해도 인간의 구원은 항상 인간의 가능성 너머에, 즉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다.

  • 토라(가르침)의 본질적 교훈

마가복음 12장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갈 2:19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롬 7:12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비록 방식은 조금 달라졌지만 교훈과 지혜의 지평이 신약성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물론 지혜까 차지하는 비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성경에서 분명히 교육에 대해 언급하는 곳에서도 교훈과 지혜는 성경적 교육학의 토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교훈과 지혜는 이미 성경 자체 안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인과응보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렸을 때, 그리고 율법에 집중하는 삶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유지될 수 없을 때가 그렇다.

새로운 인간(인간 갱신)

고후 3: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롬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다. 이 새로워짐(갱신)은 곧 구원으로 이해되며, 이 구원은 타락을 극복한 인간을 지향하며 새로운 인간을 가능하게 한다.

  • 교양의 희망과 한계 : 비관주의적 처벌 교육학 vs 교육학적 구원론

신약성경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인간은 시간 속에서 완결되는 과정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보면 갱신은 인간적 수단에 의해 달성할 교육 혹은 교양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최고의 교양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결국 그런 시도는 인간성의 특성이 드러나는 인간 갱신이 아니라 오히려─예컨대 전체주의 체제의 경우처럼─가장 심각한 비인간화로 귀결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 있는 악을 통제하는 데 목표를 두고 금지 · 감시 · 처벌에 철저히 몰두한다. 이런 교육은 인간 갱신이라는 희망의 전망에 관심이 없다.

신학적 성찰에 기초한 교양 이해는 두 극단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비관주의적 처벌 교육학, 다른 하나는 교육학적 구원론이다.

성경적 신앙으로 이끄는 종교적 가르침

  • 종교적 가르침의 필요성

특정한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종교적 가르침을 거쳐야 한다는 말은 처음 들으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예컨대, 습관화, 종교 의식 참여를 통한 사회화, 입문 형식이 등이 있다. 이 방법들은 지식보다는 태도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준비되었음을 입증한다.

가르침은 종교 의례에 참여하는 것이나 습관화라는 의미에서의 사회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르침을 이것들로 대체할 수는 없다.

어떤 신앙에 관여하는 일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요구한다면 종교적 가르침은 더욱더 불가피하다. …스스로 질문하면서 비판적으로 씨름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어린이들의 질문 : ‘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장

20 나중에 당신들의 자녀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당신들에게 묻거든,

21 당신들은 자녀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옛적에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있었으나,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 어린이에게 질문을 받으면 종교적 전승을 제시하되 내러티브 형태로 제시해야 한다. 이 전승과 친숙해짐으로써 종교를 이해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이런 성경적 근거들이 독자적 학습 문화, 거룩한 경전과 관련된 학습 문화가 발전하는 데로 이어졌다.

종교적 성숙

  • 성숙함 : 참된 기독교 신앙과 이 진리를 왜곡하는 인간적 기만을 분별하는 능력

임마누엘 칸트의 확신에 의하면, 종교적 권위는 무비판적 추종자들을 그런 미성숙의 굴레에 붙잡아 놓는다. 계몽된 인간에게서는 이제 그런 권위가 물러나고 고유한 판단 능력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성숙에 대한 요구는 종교와 신앙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에 맞서 신앙 안에서의 성숙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적 성숙을 종교적 교양의 근본 목표로 간주하고 교회의 가르침에서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에베소서 4장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14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루터 번역: 우리가 미성숙하지 아니하여).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미성숙하지 아니”함─이것은 종교적 진리 주장과 유효성 주장을,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참된 기독교 신앙과 이 진리를 왜곡하는 인간적 기만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 교사의 필요성

이런 맥락에서 교사 직분이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이로써 우리는 교양이 교회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앙과 이해─성숙과 비판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형성된 이해─는 불가분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