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자료
- 지난 시간 돌아보기 : (p.35 ~ p.83)
2부. 선교의 하나님
p. 93 ~ p. 168
3.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다
p.94 이 전체 시나리오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신 야웨를 확실하게 아는 것뿐이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출6:7)
…따라서 출애굽을 통해 예상되는 결과는, 이스라엘이 야웨를 하나님으로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몇 가지 근본적 진리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p.95 그렇다면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은 야웨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 (1) 야웨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과 (2) 그분이 주권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며, (3) 야웨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p. 97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 야웨의 왕권은 바다를 건너 바로의 군대를 쳐부순 역사적 사건이라는 맥락 속에서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의 시적 표현들은 고대 근동, 특히 엘(El)과 바알(Baal)에 대한 가나안 서사시에서 나온 신화적 전통들을 차용한다. … 물론 이렇게 가나안의 비유적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구약에 엘과 바알의 신화를 받아들였다는 말은 아니다. …구약은 바알의 왕권을 나타내는 말을 차용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통치를 야웨에게만 돌림으로서 그러한 주장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다.
…이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의 하나님 야웨에 대한 진리를 인식해야 한다. 그 진리는 야웨의 원수들(인간 원수건 신이라고 주장하는 존재건)이 야웨의 왕권과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p.98 하지만 야웨가 지닌 왕권의 본질, 즉 야웨가 실제로 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은 좀 뜻밖이다. 그분은 약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왕권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p.99 야웨는 사랑하기를 좋아하시고, 특히 궁핍한 자와 나그네들을 사랑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그런 궁핍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지금 왕으로 알고 있는 야웨는 자비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이다.
p.100 …이스라엘이 구속과(출애굽, 34, 37절) 계시를 통해(시내 산, 33, 36절)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했는가? 모세의 결론은 “오직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다]”라는 것이다.
p.101 하지만 이와 같이 주장하고 난 후에도, 사실 구약이 종종 다른 신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명확하게 독특한 실재인 ‘하나님’ 야웨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유대 유일실론의 본질적 요소, 즉 그것을 유일신론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 유일성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를 독자적인 부류에 속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혹은 초자연적인 다른 어떤 존재들과도 완전히 다른 부류다. 설사 이 존재들이 ‘신’으로 불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이것을 야웨의 초월적 유일성이라 부른다.
p.112 야웨는 자신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증거하는 일을 자기 백성에게 맡기신다.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야웨에 대한 이 위대한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야웨가 자기 백성의 증거를 통해 열방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바로, 신들 중 가장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는 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가 자신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것처럼 역사를 예측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열방은 자기 신에 대해 이런 것을 증거할 수 있는가?
“…다른 나라들은 아직 이것을 아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너희가 출애굽과 시내 산에서의 만남을 통해 방금 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유일하게 아는 너희는 이제 유일한 청지기다”
p.115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
이스라엘의 해방이 억압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했다. 이 원수들 역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애굽에 내린 재앙들에 대한 생생한 기사가 시작된다. 그 기사가 나온느 동안 우리는 출애굽기 7-14장 내내 “그리하면 너희가 알리라”는 주제가 되풀이되는 것을 본다.
p. 118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의 마음과 그 시대 선지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해 커다란 질문들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다. 하나님의 성은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의 바볼린 신들이 야웨의 경쟁 상대라는 의미인가? 야웨는 패배했는가? 고대 근동의 거시 문화적 세계관은 이 땅에서 일어나느 사건들이 천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라고 가정했다(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그런 가정을 하고 있었다.)
앗수르 장군의 자랑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그 자리에서 앗수르 군대를 격퇴하셨다. 하지만 1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다시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짓밟아 산산조각 내 버렸고, 왕을 잡아갔으며, 성전을 태워 버리고, 남은 인구를 포로로 잡아갔다. 야웨의 원수들이 마침내 승리했는가?
…이제 문제는 야웨의 진짜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아니면 더 예리하게 말해서, 이스라엘의 진짜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야웨에게 끈질기게 반역함으로, 야웨를 원수로 바꿔 버렸다.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하나님이 많은 선지자를 통해 많은 다른 나라들에게 말씀하셨던 이 불길한 말이, 이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임한다(겔5:8). 그래서 느부갓네살의 승리는 야웨를 이긴 승리가 아니라(느부갓네살은 분명 그것을 그렇게 해석했다.) 야웨의 승리다. …이스라엘이 야웨와 같은 편이라면, 예루살렘은 파괴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p. 120 실로 아모스가 바벨론 유수 한 세기 전에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백성이라 해서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기는 커녕, 그 지위에 걸맞은 윤리적 삶을 살지 못했을 때 더 엄중한 벌을 받게 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신10:17)
p.122 야웨의 심판은 의롭고 공정하다.
이스라엘의 극악무도한 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도덕적 대안도 없으셨다. 야웨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겔 14:23)은 이스라엘만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열방들 역시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서다(겔 38:23). …즉, 정의가 야웨의 통치의 가장 핵심이며, 이것은 모든 열방에게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심지어 심판을 받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p.124 포로들은 적국의 성읍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의 과업(선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업은 그 성읍이 잘되기를 구하고 야웨가 그 성읍에 복을 내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그들이 소멸되지 않고 증가할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대행자가 되어야 했다.
p125. 심판을 받는 열방들. 몇몇 선지자들은 종말론적 환상에서 열방 중 일부가 궁극에는 야웨에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며, 심지어 이스라엘에 속하고 그들과 동일화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상한다.
그의 책(에스겔) 처음부터 끝까지 불타오르는 한 가지는 야웨가 이스라엘에 의해 그리고 열방에 의해 확실하게 하나님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너희는 [혹은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말은 사실상 에스겔이 서명처럼 쓰는 말이다. …이것은 그저 열방이 우연히 여러 신 가운데 야웨라는 신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리라는 의미일 리는 없다. 그것은 열방이 야웨 한 분만이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한 정체성, 보편적 통치, 무적의 권능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알게 되리라는 의미다.

4. 살아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다
p.131 예수님은 앞 장의 결론에 나오는 모든 주장을 믿는 백성 가운데서 태어나셨다. 예수님 자신이 이 성경을 배우고 사랑하셨으며 그 성경의 진리를 믿으며 살아가셨다.
…이따금 사람들은, 신약에는 “예수님은 하나님(God)이시다”라는 말이 별로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약에서 발견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인 야웨가 그 하나님이며 성에 나온 그분의 정체성, 성품, 행동의 모든 풍성한 차원에서 초월적으로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이 야웨를 주의 깊게, 영속적으로, 모든 세세한 항목까지 나사렛 예수와 동일화시켰다는 사실이다.
p.132 예수님은 야웨와 같은 정체성을 갖고 계신다
마라나타. 바울은 고린도전서 끝 부분을 ‘마라나타’라는 아람어 표현으로 마친다. 그 말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쓰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잘 아는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말한 ‘마르’(mar)라는 아람어는 ‘주’라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람어 마르(혹은 marah, maran)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의 아람어 문서들을 보면 그 용어가 하나님에 대해 사용된 경우가 대단히 많이 있다.
퀴리오스 예수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단순한 단언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오래 전에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사실상 하나님을 나타내는 네 글자 야웨(YHWH)를 번역하는 표준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아도나이라는 말을 그들은 ‘호 퀴리오스’, 즉 ‘그 주님’(the Lord)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헬라어 성경을 읽으면서, 호 퀴리오스를 대할 때 ‘그 이름’, 야웨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p.136 성경적인 하나님의 선교가 하나님의 참된 정체성(이스라엘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의 야웨)을 알리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포함한다면, 신약은 예수님을 야웨와 동일시함으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그 자기 계시적 차원의 중심으로 본다.
p.137 예수님은 야웨의 기능들을 수행하신다
창조자.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꼬박 세 장에 걸쳐(고전 8-10장) 목회적·신학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바울은 그 문제를 쉐마(위대한 유대교의 유일신론적 고백)를 통해 풀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만물이 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다. 그리고 만물이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라면, 소위 다른 신과 우상들은 우주에서 실재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창조는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선교의 기반을 형성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구속적 의도를 종말에 가서 최종적으로 받는 수혜자다. 그러므로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교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분명하게 초점이 맞춰진다.
p.142 통치자. 야웨는 모든 실재의 근원으로서 그리고 모든 역사의 주권자로서 다스리신다. 시편33편이 표현하듯이, 야웨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며(6-9절), 계획대로 세상을 다스리시며(10-11절), 자신의 눈앞에서 세상에 책임을 물으신다(13-15절). …야웨 한 분만이 모든 것의 통치자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예수님은 그저 ‘부재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지금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즉, 예수님은 이미 지금 오로지 야웨께 속한 우주를 통치하는 일에 동참하고 계시다.
p.145 심판자. 구약에서 야웨의 주권적 통치의 한 차원이었던, 그분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에 참여하신다면,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도 참여하실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행동 변화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9-12)
p.147 구원자.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구원 사역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야웨의 가장 주된 활동과 특징이다. 사실 구원이 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호수아(여호수아, 예슈아, 예수)라는 이름은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다. …자신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나이든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는(아마 부모에게 아기의 이름을 물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이제 “내 눈이 주의 구원[주의 예호수아]을 본”(눅2:30) 것을 감사했을 때, 특별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완전한 성경적 의미에서 구원은 죄사함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물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모든 필요와 위험의 가장 깊은 뿌리가 죄이므로, 구원의 가장 깊은 핵심부에 죄사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그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라는 성난 질문에 직면하셨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은(마 21장), 분명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스가랴서 9:9의 예언에서 나온 생생한 행동이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그들은 “호산나”하고 외쳤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이라는 긴급한 부르짖음이다.
p.150 독실하게 성경을 믿었던 최초의 유대인 제자들은 신들 가운데 오직 야웨만이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는 다른 어떠한 구원의 원천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과 동시대 인물인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 야웨의 정체성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 똑같이 배타적인 구원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완전히 확신했다.
p.152 예수님은 야웨의 선교를 성취하신다
따라서 신약 문서에 나오는 여러 요소들의 일관된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와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계시며, 구약에서 오직 야웨만의 특권으로 나오는 기능들을 수행하신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만일 야고보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유일신론 자체(”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가 마귀들처럼 두려워서 떠는 믿음 이상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면(약2:19), 그저 유일신론에 예수님을 더한다 해서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점이다.
구약이 그처럼 초월적 유일성을 지닌 분이라고 단언하는 이 하나님의 선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신약의 고백은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정체성 및 기능뿐 아니라 그분의 선교와도 연결되어 있는가?
p.153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야웨는 땅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기를 열렬히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노출되는 것을 통해서든, 이스라엘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방식에 의해 궁극적으로, 열방 역시 회개와 구원과 예배를 통해서든 반항하고 악을 행하여 멸망당하는 것을 통해서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될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2:14).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그러한 것이다.
…예수님은 일반적인 사신들이 그러하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대행자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바로 전달되는 내용이시다. 예수님이 전파되는 곳에,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4-6)
성경적 유일신론과 선교
p.160 피조물의 유익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려 있다.
선교는 이미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류에게 또 하나의 종교적 짐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을 아는 것에 우리의 영생이 달려 있는” 한 분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그 지식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피조물의 유익은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인류에게서 온다.
p.161 …이는(성경적 유일신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정체성, 성품, 기능, 구원의 행동의 모든 충만하심에 대한 성경적 계시를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들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하늘의 계산법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신 분(야웨)의 정체성과 성품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신4:32-40). 그들은 그분을 정의, 자비, 성결, 진리, 정직, 사랑, 충실, 주권적 권능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했다. …그분은 구약의 가장 유일신론적인 책에서, 종으로 자신을 열방에 알리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다. 그러한 종의 정의, 자비, 해방, 계몽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그분은 대속적 고난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사 42-53장).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그분은 초월적 유일성으로 육신을 입으셔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의 인성 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에게 ‘유익한’ 유일신론은 이 하나님을 아는 것뿐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참 모습대로 알려지기 원하시는 것이다.
p.161 알려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우리 선교의 주요 동기다.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분명한 의도를 발견한다. 그것은 야웨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이 열방에 전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된다.
성경적 유일신론에는 부단한 기독론적 투쟁이 포함된다. …구약에서 반복해서 묘사하듯이, 유일신론을 둘러싼 정황은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 가까웠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게 야웨만이 하늘과 땅의 하나님, 세상의 창조자, 모든 민족의 통치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한 분만이 주님, 하나님, 구세주라는 것도 즉각 명백하게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증거하도록 부름받았고 기독교 선교가 세상에 선포하는 진리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분이라는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유일하다는 말을 이런식으로(다원주의자들의 방법대로) 사용하면, 예수님이 유일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특정한 부류(’종교 지도자’ 혹은 ‘신적 존재와의 구원적 접촉의 대행자’)에 속한 유일한 예라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경적 유일신론은 찬양을 불러일으킨다. 구약에서 찬양은 단순히 행복하고 감사한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힘든 시기를 포함한 삶 전체에서 한 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곤경에 처해 있는 시편들도 찬양을 향해 나아간다. 심지어 시편 전체를 보아도 앞부분에서는 애도와 간구가 주를 이루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찬양이 거의 전체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웨가 ‘그 하나님’, 즉 그런 눈부신 성품, 그런 확고한 구속적 행동, 그런 신뢰할 만한 신실함을 지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떄문에, 단 하나의 올바른 행동은 찬양하는 것뿐이다.
p.168 유일신론은 선교적이다. 그것은 찬양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찬양을 세계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일신론의 선교사적 본질은…구약 이스라엘과 유일하게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우리 신앙의 뿌리에서 나온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선교로 인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교회를 보내셨다. …오직 이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시키셨다. 그리고 화목의 선교와 사역을 예수님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에게 맡기신 분은 바로 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성경적 유일신론의 선교사적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