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총에 관한 묵상

묵상 포인트: 나는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은혜 받는 것을 보며 불편해 한다.

  •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비유의 마지막은 집안에서 잔치를 즐기는 둘째 아들과 집 밖에서 분노하는 큰 아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집을 나갔던 탕자는 집안으로 영접받아 아들로 회복된 반면, 아들답게 행동한 것처럼 보였던 사람은 종의 태도를 드러내며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다.

  •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일찍 온 ‘형’들은 한시간만 남기고 일하러 들어온 ‘동생’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감사가 아니라 원망을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하루 한 데나리온이면 결코 박한 대우가 아니였기 때문에 일찍 온 사람들은 ‘동생들’이 오기 전까지는 기꺼운 마음으로 일했을 것이다.

  •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결말은 ‘이와 같이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경고로 끝나고, ‘탕자의 비유’의 결말은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다독거림으로 끝난다. 두 이야기의 사태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이야기 모두 남의 은혜와 비교하다가 나의 은혜조차 잊어버리지 않도록 독려한다.

질문: 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선물’로 기억하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받을 만한 대가’로 여기고 있나요?

  1. 성탄에 관한 묵상

묵상 포인트: 성탄은 예수님이 나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 자리로 오셔서 우리보다 앞서 구원의 길을 여신 사건이다.

  • 성탄절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의 탄생을 더 놀라워야 할 까닭이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속의 교리를 들어 성육의 논리를 이해하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처음부터 부자연스럽다. 사람만이 사람의 죄를 속한다면 구약의 동물 제사는 애초부터 무의미하다.

  •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기에, 우린 이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누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수동적으로 받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일구어 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면서 또한 달려가 쟁취해야할 목적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 내가 나를 해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의 구원은 대속적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선 자리로 오셨고, 내 자리에서 죽음의 공포와 투쟁하였다. 그가 먼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셨기 때문에 나 역시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긴다. 그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자 또한 나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나 역시 고난 속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그래서 그의 길은 “대신”가신 길이 아니라 “앞서” 가신 길이 된다.

  •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성탄의 밤은 거룩하다. 먼저 영문 밖에서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심으로써 우리가 뒤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자애로운 대제사장”이시며, 먼저 영원한 제사로 성소를 향한 길을 내심으로써 성소를 향한 우리 걸음에 담력을 주신 “믿음의 선구자”시다.

질문: 예수님의 길이 ‘앞서’ 가신 길이라면 내 삶에서 특별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요?

  1. 성찬, 차별 없는 은혜와 성도의 하나됨

묵상 포인트: 성찬의 참여는 개인의 자격 심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한 몸으로 부름 받은 공동체의 은혜를 드러내야 한다.

  • 성찬과 관련하여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라는 바울의 권면에 따라 자신을 살피는 것이 성찬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한다. 성경해석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성찬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잘못된 번역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 “그 후에야”는 헬라어 ‘후토스’라는 접속사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이와 같이’, 혹은 ‘이처럼’이라는 뜻으로, 어떤 두가지 대상의 유사성을 포착하여 논증을 끌어가는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라는 바울의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각자 자신을 살피게 하라. 그리고 이렇게 성찬을 먹게 하라.”

  • “자신을 살핀다”라는 말은 같은 문맥 속에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두 가지 더 나타난다. 복수형으로 바꾸어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동사의 목적어를 달리하여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을 살피라는 바울의 권고는 성찬에서 드러나는 고린도 교회의 파당적이고 분파적인 행태를 겨냥한다. 한마디로, 파당적 태도를 보이며 성찬을 더럽히지 말고 모두 다함께 성찬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 물론, 성찬에 앞서 내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죄인됨은 더 간절한 성찬 참여의 이유는 될지언정 그 방해거리가 될 수 없다. 바울의 가르침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고한 공동체적 의미의 ‘자기 성찰’을 실천하는 일이다. 어떤 방식을 취하건, 성찬은 우리가 다“한 몸”에 참여하기에 모두가 ‘하나’라는 깊은 진리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질문: 나는 성찬을 받을 때 “내가 자격 있는가?”에만 집중하고, “우리가 한 몸인가?”라는 질문은 놓치고 있지 않나요?

  1. 부활의 충격과 깨달음의 뜨거움

묵상 포인트: 부활 신앙은 단순한 외적 충격이나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깨달음에서 깊어져 간다.

  • 누가복음 24장의 부활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가 될 것으로 “바랐었다”’라는 표현에서 묻어나듯, 예전의 생생한 기대감을 현재의 적나라한 현실과 대조하면서 좌절된 희망의 쓰라림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또한 빈 무덤과 여인들의 증언만으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을 수는 없었다.

  • 흥미롭게도, 주님의 꾸짖음은 빈 무덤이나 여인의 증언을 무시하는 것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겨냥한다. 결국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부활절 만남은 그들의 가려진 눈을 열어주는 한바탕 진한 성경 공부로 이어졌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의 행동을 그대로 재현했을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결국엔 “그를 알아본다” 다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다. 이렇게 이야기의 초점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넘어 ‘성경 강해자 예수’에 맞춰진다.

  • 우리는 종종 외적 충격으로 우리의 내적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신 부활 체험의 바탕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는데,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질문: 나는 신앙의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큰 체험’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요?

  1. 부활의 주님, 우리를 살리시는 영

묵상 포인트: 십자가 복음과 부활의 복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살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실제 능력이다.

  •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말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성도들의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곧 바울 속에 내주하면서 그의 삶을 인도하는 부활의 주님이었다.

  • 다소 역설적이지만, 바울의 십자가 ‘편집증’은 실상 부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에 속한다. 바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가 선포한 십자가 복음의 배후에는 이 십자가 복음이 ‘성령의 능력’의 원천이라는 깨달음이 놓여 있다. 물론 이 성령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여기서 믿고 고백하는 내용은 바로“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라는 부활 신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바라보는 십자가는 나를 대신한 ‘고통’에 대한 심리적 심취가 아니라, 죄에 대해 죽게 함으로써 새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도 상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어쩌면 부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는, 세상적으로 큰 ‘힘’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복음의 ‘힘’은 과시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기력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질문: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 안에 임재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새 생명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