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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년 4월 30일 내용: 2장. 멋을 음미하는 ~ 산 위의 동네 (103~152) - 조의형 장소: 이지윤선생님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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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해석자, 자리를 찾다

I. 멋을 음미하는 성경 읽기

1) 멋을 음미하는 성경 읽기

우리는 늘 먹는 음식을 가끔 다른 그릇에 담아보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종이학 천 개를 접거나, 기념일을 챙기거나,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한 마디 말 속에 진심을 담기 쉽지 않아서, 시간·돈· 노력 등을 들여 일상의 삶에서 특별함을 더한다. 그리고 이 특별함에 행복을 느낀다. 익숙한 것을 생소하 게 만들어 새삼스레 발견하게 하는 것을 ‘다름과 낯섦’이라고 한다.

글에는 내용(메시지)과 형식(내용을 꾸며주는 실제 삶에 가깝게 만들어 주는 노력)이 있다. 글을 읽을 땐 글을 더 잘 이해하고, 읽는 재미를 위해 내용과 형식 둘 다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종종 비유를 사용 하고, 성경에서도 많은 비유가 나온다. 포도나무, 마시는 물, 먹는 떡과 같은 다양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생소한 것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새롭게 느끼며, 예수님이 ‘아닌’ 다른 이름을 들으며 그의 생김새를 새롭게 되새긴다.

‘다름과 낯섦’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새삼스레 발견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시편 119편은 율법에 관한 시로 “하나님 좋아요, 율법 좋아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는 총 22연으로 각 연의 첫 글자를 히브리어 알파벳 순으로 배치하는 ‘기교’를 선보인다(번역본으론 알 수 없다). 또한 내용에서도 ‘율법 좋아요’를 ‘율 법’으로만 나타내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들’, ‘주의 도’, ‘주의 법도’ 등 율법과 상응하는 낱말이 하나씩 등장한다. 이런 시적 기교들은 시인의 고백을 그럴듯하게 하고 그의 진술을 사실로 만들어 주어 진리의 환경을 조성한다(기쁨에 관해 말하는 설교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처럼). 이런 기교를 사용한다고 해서 내용이 더 심오해지진 않지만 ‘기교’를 통해 시인의 정성을 알 수 있으며 글의 형식을 통 해 내용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다. C. S. 루이스는 이를 ‘오랜 시간 한 땀 한 땀 바늘로 수를 놓아 장 식을 만드는 일’에 비유하였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절부터 시작되는 이 야기는 제사가 시작되는 9절부터 역설과 반전이 거듭된다. 화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태를 반전시 키셨다”라고 말하는 대신 이야기 자체에 반전의 모양새를 심어두고, 읽는 이로 하여금 몸소 체험하게 하였 다. 이처럼 이야기 속의 움직임을 느끼며 읽는 경우와 그저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의 명제로 진술하는 것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화자의 의도대로 음미하며 22장을 읽게 된다.

<표 1> 역설과 반전의 창세기 22장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 위에 지웠다(6절)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다(9절)
함께 예배하고 돌아오겠다(5절)숫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이삭과 ‘함께’ 예배하게 됨(13절)
함께 예배하고 돌아오겠다(5절)브엘세바로 “함께 길을 갔다”(19절)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태도(12절, 여레
엘로힘)로 인해 거짓이 진실이 됨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절)‘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13절)

2) 멋스러운 읽기를 위하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야 할 때도 있지만, ‘멋스럽게’ 먹어야 할 때도 있다. 햄버거를 허기질 때 먹기 와 썸남·썸녀 앞에서 먹기는 같을 수 없다. 성경 읽기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능사라고 말하는 세태지만, 때때로 다독은 진정한 의미의 책 읽기를 피하는 가장 교묘한 수단이다. 숨 안 쉬고 사도 신경을 외워 내려가면 그 내용을 음미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읽기가 하나의 ‘체험’이라면, 그래서 천천히 본문의 맛을 음미하여 읽는다면 이 과정은 우리 삶의 굴곡

을 더듬는 과정이다. 삶의 굴곡은 글의 형식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형식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창세기 22장을 읽는 것처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원한다면, 무조건 읽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II. 말씀의 논리 따라잡기

1) 문장이 아닌 생각의 흐름을 알아야

“어젯밤에 폭설이 내렸다” + “나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젯밤에 폭설이 내려서 나는 오늘 학 교에 가지 않았다” ????????

하나님의 생각을 제대로 간파하려면 “과연 이 본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라는 궁금함을 갖고 매우 적극적으로 성경의 문장(논리)을 파악해 가야 한다. 이 점에서 성경 번역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개역한 글 성경은 유려한 문장이 많지만 ‘왜냐하면’, ‘그러나’ 같은 접속사를 자주 무시한다(개역개정도 거의 개선 되지 않았다). 특히 논리적인 논증이 주를 이루는 바울서신에서 접속사의 생략은 바울의 복음이라는 일품 요리의 재료를 일일이 맛보면서 정작 그 재료의 합인 요리 자체를 맛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That is why I am so eager to preach the gospel also to you who are at
  •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바울은 로마 교회를 스페인 선교의 교두보로 삼고 싶어 했다. 따라서 로마 교회에 자신을 잘 소개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이에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내 방문 의사를 밝혔다(15 절). 다만,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로마 교회에 방문하기 위한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그 내용이 1절에서 15절(본인은 모든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모든 이방인에게 빚진 자로서 로마 를 방문하여 복음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명 수행의 일부이다)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의 이러한 노력은 로마 교회 방문의 목적도 있지만 모두 복음을 위한 열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후 의 내용에는 복음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문맥에 따라 15-16절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에는 “왜냐하면”이 누락되어 16절은 전혀 ‘뜬금없는’ 진술처럼 되어 버린 다. 16-17절에서도 같은 현상이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 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또한 이방인에게입니다. 이는 그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 이며 곧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의입니다. 기록된 것과 같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2) 논증의 흐름을 파악하는 성경 읽기

로마서 1장 15–17절은 16절이 핵심 진술이며, 15절과 17절은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문장 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라는 내용을 여러 번 읽어도, 곧바로 “복음이 구원의 능력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라는 흐름이 쉽게 드러 나지는 않는다. 이처럼 바울 서신은 논리적 사고를 요구함에도 우리는 종종 대충 읽고 지나가며, 결국 자 신의 생각에 맞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그분의 길 또한 우 리가 원하는 길과 다르다. 읽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그 의미를 따라가는 수고를 외면한다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남의 글을 대충 읽으려는 경향은 내 입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죄의 속성과 관련된다. 본문의 생각을 존중하며 그것을 조심스레 따라가기보다는, 각 구절을 끊어 읽고서 그것 을 내 머릿속의 조리법에 따라 요리하는 것과 같다. 조리법은 나의 요리를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이며, 성 경 구절에는 그것이 ‘접속사’이다. 따라서 접속사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데, 이는 말씀의 권위는 써먹고 싶지만 말씀의 논리가 내 논리를 흔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이기적 습성과 같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경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세계로 결코 들 어갈 수 없다(행8:26-40). 중요한 것은 무작정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인 가? 많이 읽는 것? 말씀의 도전이 반갑지 않은 우리의 맹목적 열정? 심판의 기준이 ‘들음’이 아니라 ‘행 함’이라면, 그 행함이 정확한 말씀의 전달을 전제한다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행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III. 말씀의 칼날 피하기

“선생님, 제가 봤는데요! ”, “아니에요! 저도 봤어요! ”라며 떠들어 대는 아이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 게 이야기한다. 물론 듣는 것 보단 낫지만, 온전한 사실은 아니다(예시: 유리장인). 시각은 선택적이고 주 관적이다. 사물(상황)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우리의 인식은 나름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채색되고 굴곡된다. 이를 ‘입장 차’로 설명할 수 있다(예시: 바람 핀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 vs 친정엄마). 성경의 메시지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다. 읽는 사람의 관점이 제각각일 뿐이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주관적’ 해석의 영역은 종종 자기를 변호하고 말씀의 권위를 빌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수단이 된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로운 양날 칼에 비유한다. 이 말씀의 칼날은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곧 드러나지 않은 우리의 속을 까발려 숨은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이는 위협적이고, 거북하다.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말씀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어떻게든 다치지 않 고 말씀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 이를 통해 명분(말씀)과 실리(욕심)를 한꺼번에 챙기고자 한다.

1) 관찰의 중요성: ‘소금’에 관한 말씀

이런 정치적 실수(자기 정당화)를 줄이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꼼꼼히 본문의 내용을 관찰하는 것 이다. 빨리 읽을수록 선택적으로 말씀을 읽기 때문이다. 영어로 말씀을 읽으니 더 와닿더라! (잘난 척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어라? 진짜였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 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3

우리는 이 말씀을 ‘소금이 되자’라는 격려로 끝을 맺지만, 핵심인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는 무시한다. 이 와 같이 말씀의 칼날을 피해 선택적으로 읽으며, 이는 나의 칼로 말씀을 재단하는 ‘오만’이다. 사탄이 성경 을 인용하며 세속적 욕망을 위장하는 것, 화려한 종교의 모양으로 참된 경건의 도전을 피하는 바리새인, 말씀에 순종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그 말씀을 주물러 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는 사람이 그 예시이다. ‘소금’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주는 교훈은 ‘듣는 것’은 어려우니 차근차근 읽으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표 2> 소금: 우리의 해석 VS 하나님의 뜻

세상에서 맛을 내는 존재가 되어라.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존재가 되어라.
너희는 소금이 되어라 (권유)너희는 소금이야 (비유)
소금? 아, ㅇㅋㅇㅋ! 알겠어요! (조미료, 방부제)소금? 도대체 무슨 말이죠? (진짜 궁금)
우리에게 익숙한 소금화목함의 매개체, 황폐함의 상징 등 다양한 쓰임새
소금이 아니면 무엇으로 짜게 하냐?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짠맛을 내냐?
소금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렴! (격려)맛 잃은 소금처럼 버림받을래? (경고)
  • 관찰의 중요성: ‘빛’에 관한 말씀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3-16

산 위의 동네(라고 쓰고 도시라고 읽기)는 산 위에 세워져 있어 ‘드러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빛’ 역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드러남을 통해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라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15절의 ‘말 아 래’와 ‘등경 위’의 대조는 이러한 빛의 속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비 유는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듯, 제자도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씀은 ‘어둠을 밝혀라’라기보다 ‘빛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는 뜻에 가깝다. 결국 빛 의 역할은 드러남을 통해 보이게 하는 것이며, 제자도의 핵심 또한 드러남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말씀의 칼날로 찌르는 것이다.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을 어렵게 말로 전달하려고 한다”**라는 말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말이 더 효과적이라서 떠드는 것 이 아니라, 보여줄 것은 없으면서 애써 말로 때워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방송국을 향해 실력행사를 마다하지 않는 보수 교회).

오늘날의 교회는 복음이 우리 삶에서 확인되지 않은 이상함, 혹은 우리의 말을 우리의 삶이 부인하는 이 율 배반의 비극이며 **‘과대광고’**이자 나도 못 누리는 복음을 남에게 팔겠다고 하는 일종의 ‘사기’이다. “하 나님보고 믿지 사람 보고 믿나?” 이 표현 자체가 비성경적 표현이다. 주님은 우리더러 “보여주라” 했는데 “우리 말고 주님만 쳐다봐요”라고 말하는 것은 제자로서 직무 유기이다. 드러냄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그 사역에 실패한다면, 제자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소금과 빛에 관한 우리의 해석은 성급함(자기중심적 태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급함은 우리가 읽는 말 씀을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것이지 말씀 자체에 대한 깨달음은 아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접속사 하나를 주의 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말씀의 이해가 달라진 경험이 있나요?

▷ 성경을 읽다가 ‘아, 이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구나?’라고 느꼈던 경험이 있나요?

▷ ‘드러남’과 관련하여 나는 무엇을 드러내며 살고 있다고 느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