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자료
5.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대결하신다
p.169 성경 곳곳에 나오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갖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든 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상숭배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진정하고 사려 깊은 기독교 선교의 중대한 부분이다.
신들의 역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하나님 야웨와 관련해서 신들에 대해 무엇을 믿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숭배하면 안 되는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인했다는 뜻인가?
구약학자들의 전형적인 대답은 … 이스라엘의 종교 역사가 다신론(수24:14)에서 단일신론(이스라엘에게는 오로지 야웨만 예배하라고 요구하지만, 다른 민족들의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을 거쳐, 상당히 늦은 시기에 나온 최종 결론인 참된 유일신론(야웨 아닌 다른 어떤 신들의 존재도 명백히 부인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가 그렇게 직선형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견해는 분명 너무 단순하다. … 문제는 좀더 복잡하며, 그런 질문들이 무엇을 내포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다른 신들은 야웨와 똑같은 게급에 속하는가? 그것들은 야웨와 똑같은 ‘것’인가? 아니면 야웨와 다른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 대해 무엇을 부인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에 대해 무엇을 역동적으로 단언하는가 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P.174 바울의 이중적 주장은 대단히 분명하다. 신들과 우상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한 분 살아 계신 하나님만 소유하고 계시는 신적 실체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들을 보면, 다른 신들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닌” 존재,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신32:21).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야웨와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상숭배라는 ‘그 무엇’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우상들과 신들은 (1)눈에 보이는 창조 세계 내의 물체 (2)귀신 (3)인간이 손으로 만든 제품이 될 수 있다.
창조 세계 내의 물체인 우상들과 신들. 이스라엘 일부 사람들은 천체를 신으로 여겨 숭배한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땅에 있는 피조물들, 곧 사람 아닌 동물이나 다른 인간들을 숭배했다. …어떤 지도자들은 바벨론 신들에게 호소하고 있고, 또 어떤 지도자들은 몇 칸 떨어진 방에서 애굽 신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귀신들인 우상들과 신들. 이스라엘은 천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최고의 통치 보좌를 둘러싼 영적 존재였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높은 무리들 중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자비하심에 도전하거나,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는 존재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바울은 예를 들면 우상들과 노닥거리다가 귀신들과 교제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전 10:18-21).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것은 사탄적 존재인 귀신들을 예배하는 것이다. 또 사탄에게 절하는 것은 신적 존재가 아닌 그를 신적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며, 살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불충하는 것이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것인 우상들과 신들. 구약에서 신들과 우상들을 귀신들로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손으로 행한 일”이라는 말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우상은 살아 있는 피조물도 아니고, 단지 피조물이 만든 것일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신적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 학자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무지하고 순진하다고 종종 비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든 이교도 예배를 주물 숭배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널리 주장되는 이러한 가정은 내가 보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당한 비난을 가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가르치려 드는 교만한 태도와 이스라엘에 대한 부당한 오해에 더 가깝다. 바벨론의 신들에 대한 중대한 논증을 쓴 이사야는 물질적인 우상들 자체와 그 우상들이 나타내는 신들 간에 존재한다는 그 구별을 분명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려는 요점은 바벨론 세계관에서 그 신들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든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곤경이 닥칠 때 그 신들은 자기 예배자들은 고사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신상조차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신들은 자기 예배자들에게 짐이 된다. …최소한 신이라면 자신의 영역과 상징물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삿6: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궤를 전투에 가지고 나가면, 야웨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고 그들을 지원해 주시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블레셋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하지만 이어서 일어난 사건들은 양측의 가정이 틀렸음을 입증해주었다(삼상4:1-11). 야웨는 이스라엘이 갖고 다니면서 조종하는 일에 사용하는 어떤 물체와도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p.191 앗수르의 위대한 신들이 유다 주위의 더 작은 나라들의 더 힘 없는 신들을 물리쳤다는 말은 실제로는 무슨 의미일까?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가 사악한 잔인함과 탐욕으로 그 나라들을 휘저었다는 의미일 뿐이다(사10:12-14). 실제로 앗수르 왕과 그의 대변인들 자신도 그런 식으로 신과 왕을 동일화시켰다(왕하 18:33-35). …앗수르인들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었다고 간주했던 신들은, 그들이 약탈한 나라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아닌’ 혹은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18절). 즉, 그들은 오직 야웨께만 속한 주권적인 신적 실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p.199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본질이나 다른 숭배자들이 자기 신들에 대해 가정하는 것들을 오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가정들과 주장들을 대단히 잘 이해하고, 그 주장들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즉, 신들 자체가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덧없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희망.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신들의 역설은 무엇인가?
첫째는 그것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적 실체 면에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이나 우상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신들은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신적 정체성과 지위와 권능과 영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신들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땅에 속해 있다.
두 번째 역설은 신들이 귀신적 질서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은 이따금, 그리고 신약은 보다 분명하게, 신들과 우상들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들의 존재와 권능을 인지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분명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모든 권세들에 대해 주권을 갖고 계시며, 그것들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고 단언한다.
선교와 신들
p.203 왜 우상숭배는 선교에서 문제가 되는가? 왜 선교는 ‘신들에게 관여해서’ 그 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 정체를 밝혀내야 하는가? …선지자들이 다른 나라들의 우상숭배를 정죄한 것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훨씬 더 많이 정죄했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어쨌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 자신들의 신들을 숭배한다면 그것이 뭐가 잘못인가?
가장 중대한 구분을 인식함.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우연히 생겨나지 않은 분이시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산악을 알” 것이라고 뱀은 약속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계 표시를 무시하기만 한다면 말이다(창 3:5).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시험의 핵심은 “선악을 알” 것이라는 두 번째 문구에 있다. …선과 악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였다. …우리 인간들은 무엇을 선 혹은 악으로 간주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함으로서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는 반역을 감행한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 3:22). 하나님은 인간들이 실제로 창조주-피조물간의 구분을 어겼음을 인정하신다. 인간들이 이제 신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의 뿌리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신격화하며,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선택 및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신으로 삼는 것이다.
p.205 그렇다면 모든 우상숭배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도덕적 권위가 최종적임을 거부한 것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강요 혹은 조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사를 위해 일하도록 함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축소시키고 통제하려고 한다.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신 하나님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우리가 이용하고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야 하는 피조물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선교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를 원래 의도된 대로, 곧 구속받은 인류의 지배를 받으며, 창조주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선교는 그러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그것의 최종적 완성을 예상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우상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계속 일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그 우상들이 조장하는 파괴적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신들을 분별함.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신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는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민족들이 경배하는 신들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모든 것, 즉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 등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달래거나 피하기 위해 그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경배한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들. …우리는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해 주리라 믿는 것들(혹은 사람, 혹은 제도)을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정을 비축해 놓으려 애쓰거나, 군사적 안정이라는 심연으로 온 세상 나라들의 엄청난 재물을 쏟아 붓거나, 개인적으로 건강을 유지시켜 주고 신체적 노화를 막아 준다고 약속하는 온갖 것들에 몰두하며, 이런 것들이 다 대단히 값비싼 희생을 요구하는 신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 …우리는 필요를 채워 주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오직 한 분 살아 계신 창조주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 빈 곳을 메우기 위해 대리 신들을 만들어 낸다.
신명기 8장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또 한 가지 미묘한 형태를 드러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필요의 공급자이자 번영의 원천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그런 공급과 번영이 모두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것 역시 한 가지 형태의 우상숭배다. 즉, 자신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것의 원천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자, 경제적 초강대국 등)
신들의 정체를 폭로함. 성경이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상들은 하나님의 정당한 영광을 가로챈다.
우상들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킨다. 우리는 (최초의 시험과 반역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너는 네가 숭배하는 대상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원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매우 명백하게 나온다.
우상들은 몹시 실망스럽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함. 성경은 우상숭배와의 싸움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야웨와 그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 간의 전투라고 분명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선교적 사랑은 우상숭배를 배격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들 및 그것들이 나타내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전투는 우리를 향한 인자하신 자비의 한 기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 가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피조물에게 최고의 유익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모순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전투와 승리는 하나님의 소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신들과의 싸움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엄청나게 강조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실 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증거하고 싸우고 저항하고 고난을 받기 위해 부름받는다. 하지만 최종 승리가 주님의 것인 것처럼, 전투도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전투는 승리주의가 아니라 사랑으로 싸우는 것이다. …우리의 선교가 영적 전투인 것을 분명히 해야 하지만, 주목적은 ‘이기는’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영적 전투는 악과 우상숭배의 세력에 억눌린 사람들을 매우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영적·개인적 결과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우상숭배와 싸운다. 영적 전투는 모든 형태의 성경적 선교와 마찬가지로, 심오한 사랑, 겸손, 동정에 의해 생겨나고 그러한 것들과 함께 시행된다. 예수님 자신이 이에 대한 훌륭한 본을 보이셨다.
우상숭배와의 대결
신학적 논쟁. …우리는 선교를 하면서 때로는 그런 담화에 참여해야 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우상숭배에 대한 이간의 탐닉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려 주는 대단히 불쾌한 나쁜 소식과 대비해서 제시되어야 한다.
전도적 활동. …이처럼 유일신론적인 복음 메시지는 루스드라의 대중적 미신(행14:8-20), 아덴의 지적 교만과 자부심(행17:16-34), 에배소의 경제적 이익(행19:23-41)에 도전했다. 이렇게 기존 신자들을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을 직접 상대할 때, 바울의 전도 전략은 솔직하고 단호하지만,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보다는 더 부드럽고 정중하다.
…하지만 또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를 후원하는 여신들인 아데미/디아나를 구체적으로 비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바울은 단호하고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했지만, 타산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다.
목회적 지도. 바울은… 종교적 문화 속에서 직면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성숙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인도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프라사단(생일이나 다른 행사를 경축하기 위해 먼저 신들에게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를 집이나 일터에서 나누어 주는 사탕이나 과일)을 거리낌 없이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의식들에 합류하거나 다신론 숭배, 혹은 다른 신들의 실재를 명백히 단언하는 어떠한 것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선지자적 경고. 선지자적 접근은 보통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신약을 보면 전도를 할 때 다신론적 세계관을 명백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특정한 신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그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을 조롱하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말하는 많지 않은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그들이 잘못된 신을 숭배해서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사회적 악으로 인해 정죄를 받는다(물론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에 대해 고발할 때는 온갖 수사학적 장치가 다 동원된다(사40-48장,렘10장,신4장). 이 같은 심한 불균형의 이유는 무엇인가? …열방의 신들에 대한 부당한 두려움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우상숭배의 헛됨을 폭로했다.
바울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도 사역을 할 때보다, 그 우상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훈련시킬 때 훨씬 더 격렬하게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순결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고, 그들을 오염시키는 혼합주의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3부 선교의 백성
6.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복 주기 위해 선택받음
바울의 복음
…성경을 보면 한 분 살아 계신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받은 이스라엘 언약 백성에 속한 사람들만이 의인의 무리에 들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안전할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 특히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과의 차이를 가장 눈에 띄게 보여 주는 율법들[삶의 정결한 영역과 부정한 영역(특히 음식), 안식일 준수를 통제하는 율법들]을 준수하는 것을 포함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에 관한 이 이야기가 성경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6-9)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라
창세기 12:1-3. 주축이 되는 본문.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본문은 “먼저 복음을 전한다” …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축복하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열방을 위해 그 축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차지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 초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이 초기 이야기들을(창1-11장) 계속 살펴보면 인간의 죄가 점차 커지는 반면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가 거듭해서 나타난다. 뱀의 머리는 상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옷이 입혀진다. 가인은 보호를 받는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는다. 삶은 계속 된다. 그리고 피조물은 언약 아래서 보존된다. 모든 것이 대단히 큰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전체 계획은 여전히 진전되고 있다.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요소가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바벨 성과 탑에 대한 이 마지막 이야기에는 그런 은혜의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지닌 원래의 선을 떠나 비극적으로 표류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여기에서 어디로 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저주가 제거되고 생명나무로 이르는 길이 열리려면, 죽음 자체가 멸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개인들의 죄뿐 아니라, 국가들의 분쟁과 갈등들도 다루어야 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인간의 악함, 나라간의 분쟁, 그분의 전체 피조물이 망가져 신음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시작이다.
창세기 12:1-3. 면밀한 고찰
떠남과 축복. …아브라함이 떠나야만 열방에 복이 임하게 된다. …가장 위대한 인간의 업적이라 해도 가장 깊은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열방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선교는 철저하게 새로운 시작이다.
바벨에 반격을 가함. …성과 탑을 건축한 사람들은 스스로 “이름을 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야망을 좌절시키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2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바벨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신 것은 분명 의도적이다. 참된 명성은 하나님의 선물로부터만,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온다.
바벨 이야기에는 다섯 번에 걸쳐 “온 땅”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것은 세계적인 혼란과 흩어짐으로 끝난다. 이에 반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세계적인 축복의 약속으로 끝난다. 하나님의 선교는 “저 멀리 저주가 발견되는 곳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약속의 발전.
언약적 순종과 선교. …이 말이 어떤 식으로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약속들을 공로로 얻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게 만든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만든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며, 그래서 실제로 그의 믿음의 진정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본문들을 선교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으므로, 중요한 점은 열방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인간의 순종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과 윤리의 본보기일 뿐만 아니라, “복이 되라”고 번역된 두 히브리 단어에 요약되어 있는 광대한 선교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하는 자격 증명서다. 믿음과 순종 없이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축복은 없다. 하나님이 열방을 위한 그분의 구속적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구원하는 믿음을 발휘하면서 또한 아브라함처럼 희생적인 순종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의 선교를 위한 궁극적 의제(열방을 축복하는 것)가 되며, 아브라함이 그에 대한 반응으로 한 것들은 우리의 선교를 위한 가장 훌륭한 본보기(믿음과 순종)가 된다.
“가라…복이 되라”
복을 주다라는 말과 복이라는 말은 … 그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은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축복은 창조적이고 관계적이다. …창세기 12:1-3에서 언급하는 축복의 말에는 적어도 번성, 퍼져 나감, 채움, 풍성함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둘 다 너무 늙었다. 그러므로 그런 맥락에서 축복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축복하실 때, 거기에는 통상 가족, 가축 떼, 재산 혹은 이 세가지 모든 것이 늘어나는 것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축복은 창조가 주는 좋은 선물을 풍성히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수직적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하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며, 그들의 하나님과 더불어 신실한 관계 안에서 살고자 한다.
그들의 믿음은 벙어리 믿음이 아니다. 족장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생활 속에서 경험한 야웨의 실상을 말로 표현한다. …야웨께서 재물을 공급하시는 것, 그분의 보호와 인도, 그분이 자녀를 주신 것…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도덕적 기준에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수평적으로. 축복의 관계적 요소들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뻗어 나간다. 축복의 창조적 차원과 관계적 차원이 가장 아름답게 결합된 예는 야곱이 요셉에게 베푼 축복이다. 첫쨰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둘쨰로, 그 축복을 누리는 배경이 되는 인격적·소유적 관계(그분은 ‘네 아버지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반석’ 등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 축복이 상상하는 창조적 풍성함이다.
축복은 선교적이며 역사적이다. “복이 되라”는 말은 미래에까지 펼쳐져야 하는 목적과 목표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선교적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시작하는 명령이다. 그 선교는 파멸로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류를 회복하고, 그들의 사악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실패와 교만에 의해 손상된 부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둘째 아담’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새로운 구속된 인류의 핵심으로 보일 수 있도록, 새로운 인류의 시작으로 만드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님이 그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단언한다.
마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알려진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위치를 똑같이 역동적으로 이해하면서, 메시아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모든 열방을 포함할 선교 위임령으로 그의 복음서를 끝낸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인간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선교를 지켜볼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거대 서사를 여는 열쇠이며, 그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축복은 언약적이며 윤리적이다. 언약 내의 축복은 이처럼 유일하게 참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지식(그분의 이름인 야웨를 계시하는 것을 통해)과 그 축복을 계속 누릴 수 있게끔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에게 헌신하는 것을 포함한다(신 4:32-40). 즉,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관계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통해 그들이 받는 축복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언약 관계 내에서 축복이 지닌 이러한 윤리적 차원은 창조적 요소를 모종의 ‘번영 복음’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믿음, 순종, 언약의 요구들에 윤리적으로 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축복은 다국적이며 기독론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과 아브라함 자신에게 복이 되라고 하신 명령의 결과는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는 것이다.
‘너로 말미암아’라는 이 중대한 말은 자신을 포함시키는 동사 형태와 함꼐, 열방이 아브라함의 복을 의도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서, 의식적으로 그 복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보여 준다. …그들이 복을 받는 것은, 축복의 유일한 원천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백성의 이야기와 동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그저 열방이 일반적 의미에서 복을 받을 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명확하게 성경 전체의 거대 서사를 알게 될 때 성취된다. 이것은 선교에 심오한 중요성을 지닌다. 세계 전역에서 소위 교회성장이라고 하는 많은 것이 지독하게 피상적이고 취약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들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해 모종의 도구적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 의해 시작된 이야기 안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서 이루어지는 더 깊은 세계관 차원에서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결어
‘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 우리는 축복이 처음에는 창조 세계 및 모든 좋은 선물들(풍성함, 번영, 비옥함, 장수, 평강, 안식)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누려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사건들 때문에 그런 관계들은 철저히 망가지고 말았다. …우리는 곧이어 그것이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후 그의 백성들 역시 이러한 언약의 윤리적 요구에 헌신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만 모든 열방을 위한 축복의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