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기도문의 서론
종말론의 시대 (누가복음)
- 에센파, 바리새파, 세례요한파, 나사렛 예수파…
- “선생께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 운동과는 강조점을 좀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니, 선생을 따르는 우리가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쳐 준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자기 시대에 자신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그에 맞는 기도문을 가르쳤듯이 선생도 선생의 구원사의 새 시대에 걸맞는 기도를 가르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
- 주기도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의 요약이다.
산상수훈과 주기도 (마5-7장)
ㄱ. 8복(5:3-16) ㄴ. 반어적 가르침(5:17-48) ㄷ.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6:1-18) - 여기에 ‘주기도문’ 위치 ㄹ. 제1 계명에 대한 설교(6:19-7:11) ㅁ. 결론적 권면(7:12-27)
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넣었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 등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론, 반면교사들 (마 6장)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과 동일시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마태판에 나오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와 뒤이어 나오는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호서”는 사실 하나의 청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네 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청원, 둘째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 셋째로 죄 용서에 대한 청원, 넷째로 지금도 완전히 박멸되지 않는 사탄으로부터의 보호에 대한 청원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청원이면서 주기도문의 중심 청원 : 하나님 나라의 오심 나머지 세 개의 청원 : 하나님 나라의 옴과 더불어 우리에게 오는 축복들에 대한 청원
<마태복음>-6개의 청원들로 구성
- 하나님 이름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3개의 ‘당신’ 청원- ①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②”(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③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3개의 ‘우리’ 청원- 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②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③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송영-”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 하나님 우리 ‘아빠’
유대 기도에 비추어 본 주기도문의 독특성
카디쉬 기도와 18번 축복기도
- 3인칭 기도와 2인칭 기도
-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vs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먼저
- 우리도 혹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 우리의 농사 등처럼 우리의 필요에 대한 기도를 먼저 잔뜩 하고, 마지막에 가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도 좀 확장되게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없는가
주기도문의 청원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다. 하나님 나라에 강조점을 두어 기도하라.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에 담긴 진리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언약 신약의 표현입니다. (그림 언어) 목자와 양 떼, 농부와 포도원, 사령관과 군대, 신랑과 신부 → 언약 관계 표현 ‘아빠’의 표현은 유대 문헌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파의 독특한 특징으로 볼 수 있음.
‘아빠’이지만 그분은 경외받으셔야 할 분이다
‘아빠’는 친근감을, ‘하늘에 계시는’은 초월성을 강조함.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되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친근하심과 초월성 양쪽을 다 강조합니다. 범신론 과 이신론 범신론 : 불교, 힌두교 등. 자력 구원론 이신론 : 이슬람. 알라는 위대하지만, 결코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초월의 신을 인정하지만 결국 이신론의 구원론은 자력 구원이다. 숙명주의, 메카 순례, 적선 등
‘아빠’ 부름은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것이다.
앎이란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추상적이거나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식입니다. 관계를 신실하게 맺음을 통해 나오는 지식입니다. 이와 같은 친근한 관계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8; 6:32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너희의 필요함을 아신다.’
즉 하나님이 아빠이기 때문에 자기의 자녀들을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사실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오심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앎이 전제되는 관계이다.
탕자의 비유 : 하나님이 항상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것이 이 아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거룩의 원래 개념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카디쉬 기도에도 나와 있음)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됨됨이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란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인정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이란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입니다.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피조물과 다른 존재라는 그 물리적 개념에서 이차적으로 윤리적인 의미가 도출됩니다.
거룩한 것은 오로지 초월자에게 속한 것이다. 성전이 거룩하다 = 성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생명에 대한 경외함의 근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므로 인해 결국 생명에 대한 경외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20:12-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임, 창42:1-18-요셉이 열두형제와 재회하다, 출1:15-21-히브리 산파)
주기도는 하나님 경외의 삶을 요구한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cf. 18번 축복기도 10-14절
- 민족 해방, 디아스포라 소집
- 유대 역사의 황금기의 회복과 지혜로운 현군의 통치
- 이단자 축출, 예루살렘과 시온에 하나님의 거하심, 다윗 왕조 재건
예수 당시 유대적 맥락으로만 보는 것의 한계
N. T. Wright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by 로마) 곧 이사야 40-66장의 복음, 이스라엘의 회복, 유다의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과 성지로의 회복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열혈당을 중심으로 이 ‘회복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무력혁명으로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 했다. 이 흐름에 예수의 종말론적 예언은 전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라는 맥락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당시 유대인들의 운동과 똑같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적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통해 이방인들의 빛 노릇 함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이방인을 원수 삼아 이스라엘을 회복하려 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유대민족주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이 종말론의 내용이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 때에는 성전이 파괴되고, 민족으로서는 끝이 난다. 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아져서, 하나님이 오시고 이들 가운데 하님이 거하심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성전이 되고, 결국 이들에게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전제는 부활이다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만큼만 이해하고 있었다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 예수가 민존주의만을 배격하는 정도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초월성과 보편성을 포함하는 식으로 재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